그리고, 서북 지방을 통해 전수받은 복음의 씨앗과 대동강서 포로로 잡혀 순교의 길을 걸었던 토마스 목사가 전한 복음의 씨앗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만남을 통해 만개하였는데 이렇게 세워진 교회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쪽 부산에 이식됐음을 알 수 있다.
여기다 우리 교회의 설립은 ‘한국 교회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보수동에 세워졌던 우리교회의 원래 이름이었던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6.25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북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다시금 평양노회를 재건한 교회이며 마침내 총회도 이북 노회원에게 67석이라는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다가오는 총회신학교 측과 조선신학교 측과의 싸움에서 보수주의가 굳건하게 지켜지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사적 바탕에 더하여지는 ‘민족사적인 의미’이다. 6.25라는 전란의 와중에서 민족의 고통을 딛고 세워진 우리 교회는 설립되면서부터 민족의 아픔을 손수 품었으며 ‘평양교회’는 바로 민족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한 실체였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교회의 지나온 과거가 그야말로 60년 동안 변변히 평가되지 못한 점에 비춰 볼 때 앞서 든 몇 가지의 해석과 평가는 앞으로 물려줄 다음 세대들을 위해 더욱 다듬어지고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