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대청교회

대청교회 역사는 이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겨우 60년 된 지역적으로 부산의 보수동과 대청동, 구서동이라는 제한적인 영역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사건의 기록’이다. 대청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동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통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대청교회사를 기억하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부분은 2000년 전의 갈보리 언덕에 세워졌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심과 그의 빈 무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짐승에게 찢기고 태워졌던 앞서간 성도들의 피가 없었던들 어찌 오늘의 대청교회가 있었을까. 하나님의 교회인 대청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흘려진 수많은 성도들의 고귀한 희생들이 있었기에 우리 대청교회의 60년은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먼저, 우리 교회의 설립 의미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2000년 전 세워졌던 사도들의 교회와 동일한 터 위에 있다.
그리고, 서북 지방을 통해 전수받은 복음의 씨앗과 대동강서 포로로 잡혀 순교의 길을 걸었던 토마스 목사가 전한 복음의 씨앗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만남을 통해 만개하였는데 이렇게 세워진 교회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쪽 부산에 이식됐음을 알 수 있다.

여기다 우리 교회의 설립은 ‘한국 교회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보수동에 세워졌던 우리교회의 원래 이름이었던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6.25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북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다시금 평양노회를 재건한 교회이며 마침내 총회도 이북 노회원에게 67석이라는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다가오는 총회신학교 측과 조선신학교 측과의 싸움에서 보수주의가 굳건하게 지켜지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사적 바탕에 더하여지는 ‘민족사적인 의미’이다. 6.25라는 전란의 와중에서 민족의 고통을 딛고 세워진 우리 교회는 설립되면서부터 민족의 아픔을 손수 품었으며 ‘평양교회’는 바로 민족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한 실체였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교회의 지나온 과거가 그야말로 60년 동안 변변히 평가되지 못한 점에 비춰 볼 때 앞서 든 몇 가지의 해석과 평가는 앞으로 물려줄 다음 세대들을 위해 더욱 다듬어지고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