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호 전도사

평양교회를 거쳐 간 사람들은 물론 평양여자신학교와 광복 이후 평양신학교 여자부를 거친 사람들은 누구나 임종호 전도사를 잊지 않는다. 서울 삼각산과 목포 춘천 충정도 등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교회의 어른들이 현재도 소수지만 남아있다. 그의 기도와 차분하면서도 감화력 있는 설교, 그리고 신비할 정도로 파고드는 성경강해,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한국교회의 여성신학자며 부흥사였다.

그는 일찍이 1890년 1월 5일(음) 러시아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했다. 구한말 정치 망명객이었던 임인수씨의 장녀였다. 아버지는 러시아 땅에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그의 모친은 정반대로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임종호에게 늘 성경을 가르쳐 주며 “조선 땅에 돌아가서 주의 일을 할 것”을 권면했다.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임종호 소녀는 마침내 조선 땅으로 혈혈단신 귀국한다. 1년간 원산의 진명학교를 다니면서 조선말을 익힌 뒤 캐나다 선교부에서 세운 마르다 웰슨 여자신학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다. 이 3년간은 임종호 전도사에게 깊은 신앙적 체험과 성경에 대한 갈증들을 풀어주었다. 때마침 조선 땅에는 1907년 대부흥의 불길이 번지고 있었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완전히 주의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주의 일을 제대로 하려니 일반학문에 대한 부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숙명여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임종호전도사는 3.1 만세의 운동에서 29세의 나이로 숙명여학교의 중간연락 등의 책임을 맡아 활약한다. 당시 숙명의 연락책 3인의 학생은 임종호(任鍾豪)·이은혜(異恩惠)·조경민(趙敬玟)이었는데 나이로 볼 때 갓 스물을 넘긴 이은혜나 조경민 보다 임종호가 8-9세 연장자였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원산 등지에서의 산전수전을 겪은 경험에 비춰볼 때 이들 가운데 가장 맏형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숙명에도 2월 28일에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의 연락이 갔으나 이날의 시위에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3월 5일의 남대문역 앞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1919년 3월 5일 오전 8시에 기숙사에서 무단으로 빠져나가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숙명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임종호전도사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고베신학 여자부 3년을 수료하고 다시 동경의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한 뒤 졸업했다.

나이 40 되도록 준비케 한 하나님은 1931년 평양여자신학교로 그를 부르셨다. 평양여자신학교 교수로 봉직할 당시 능력 있는 기도로 시작되는 그의 강의는 부흥회로 착각할 정도로 강렬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직전 생매장으로 순교당한 산정현교회 백인숙, 신암교회 장수은 전도사 등이 이 때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42년 일제의 단말마적 발악은 평양여자신학교 마저 폐교시켰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던 임종호 전도사는 여학생들에게 “여러분, 우리들은 한국교회 여자 지도자가 될 사람입니다. 한국교회 여성신앙운동에 앞장서서 한국교회를 이끌고 나갑시다”는 내용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항상 강조하였다고 한다. 결국 임전도사는 신사참배 거부에 의한 옥중투쟁을 통해 실천적으로 지도자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이 교회와 민족의 수난에 어떻게 동참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어둡고 괴로운 암흑의 시기가 지나고 광복이 되었다. 38선 이북교회는 자체적으로 평양신학교를 다시 열고 그 안에 여자부를 따로 두어 여교역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임종호 전도사는 교무주임직을 맡아 박기희, 김순호와 함께 교수로서 가르치는 일에 동역을 했다. 한국교회의 여성지도자들로 이름을 날린 이연옥, 이동선, 명선성, 조순덕, 주선애 등이 제자였다.

광복 후의 이북 정세는 점차 교회 탄압으로 방향이 잡혀갔고 마침내 6.25가 나자 교역자들은 무차별 학살되기에 이른다. 임종호 전도사도 총살현장까지 끌려갔으나 가슴과 팔 사이를 뚫고 지나간 총알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4 후퇴시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부산에 도착한 그는 1951년 부산평양교회 설립에 참여하여 심방과 전도에 전심을 다한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 이미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부흥사로 영남지방은 물론 서울 대전 등지로 다니며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했다. 창신교회 춘천제일교회 한양교회 서산교회 삼각산 기도원 등 전국각지에서 그는 300여회의 부흥회를 인도할 정도로 부흥사로서 폭발적인 명성을 날렸다. 당시만 해도 성경의 계시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교역자가 그리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학식과 영성을 고루 겸비한 임전도사의 존재는 자연스레 교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를 부르는 요청이 쇄도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도 그는 창세기, 마태복음 등의 공부에서 조용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능력에 차 있는 기도로 시작해서 성경을 꿰뚫는 안목으로 가르치는 내용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영적, 학적 권위 앞에 교회는 그를 어머니처럼 받들어 모셨다.

그러나 분열의 아픔을 겪으면서 모 장로에게서 받은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충격은 마침내 노종을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한다. 그로부터 만 10년 동안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누워 지내게 된다. 그렇지만 그동안에도 대청교회는 그를 가장 큰 어른으로 힘을 다하여 충실히 모셨다. 1층에 마련된 아담한 사택에는 늘 여전도회 식구들이 예배를 마치면 몰려와 성경을 배우고 그녀를 위로했다. 교회도 그가 소천할 때까지 기쁨으로 사례를 하며 돌보았다. 매월 사례 때가 되면 재정부장을 맡았던 조건진 장로는 직접 노종이 누워 있는 1층 방에 들러 두 손으로 사례봉투를 이불 밑에 꼭 찔러 넣어 주곤 했다. 늙고 병들어 자리에 누운 여전도사를 전혀 불평 없이 기쁨으로 모신 것은 잘한 일이었다.

마침내 1971년 11월 27일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가 늘 사랑하고 섬기던 주님께로 갔다. 교회는 대청교회장으로 하나님 나라로 간 그를 눈물로 환송했다.
임종호전도사는 일제에 항거, 3.1만세 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공산정권에 의한 박해로 고초를 겪었던 독립과 애국지사였으며 여성 신학계의 거인이었다. 살아생전 임종호전도사는 자신의 애국활동과 신학의 족적에 대해서 그다지 알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선각적 활동이 역사적 조명과 후세의 빛을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지금 대청교회가 마련한 부활동산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