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59년

1951년 6월 10일은 ‘꽃주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부산 보수산 중턱 서남향 샛길 부근 울창한 송림 속에서 약 1백명 내외의 평양성 중심 52개 교회의 피난민들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교회의 전신인 ‘평양교회’의 첫 역사가 시작 되었다.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발행되던 이 날짜 부산일보는 1951년 6월 10일 주일 맑음이라는 소식과 함께 미국의 마샬 국방장관이 방한, 리지웨이 장군과 전선 시찰한 것을 중요기사로 게재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중순, 전선에선 밀고 밀리는 전투가 한창이고, 후방에서는 전장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때였다. 형편이 어려웠으나 상황에 맞게 대처하며 사람들의 삶은 이어져 갔다.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출발시킨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의 교역자였다. 1946년부터 1948년 평양시 연화동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김윤찬 목사와 만주안동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9년부터 전쟁 전까지 연화동교회에서 시무한 김세진 목사가 함께 목사로 동역했다. 또한 평양 여자 신학교 교수였던 임종호 전도사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연화동교회의 전도사였던 최창덕 전도사도 함께 동역의 길을 걸었다.

김윤찬 목사와 김세진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나중에 각각 합동과 통합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거인들이었다. 임종호전도사는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등으로 일제로부터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다. 그는 원산의 마르다윌슨여자 신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청산학원과 고베신학을 마친 뒤 1931년 이래 11년 간 평양여자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엘리트 여성 신학자였다. 자연스레 우리교회의 신앙컬러는 평양신학교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설립 이후 곧 바로 주일학교를 창설, 교회교육의 장을 열었는데 최초 주일 학교의 교역자가 바로 이 최창덕 전도사였다. 평양교회의 주일학교에 나온 아이들은 6.25 와중에 무수한 죽음, 피비린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상처 입은 동심들이었다. 대부분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 지금으로 치면 외상후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굴레에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눈에 눈물을 닦아주는 사역이, 아무리 전쟁을 하더라도 시작된 것이다.

1952년 3월 23일 전선에서는 포성이 한창이던 그 와중에 우리교회 주일학교는 첫 번 졸업생을 배출한다. 비록 졸업장을 쥔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지만 전쟁도, 배를 곯는 형편도 다음세대를 위한 주일학교 교육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교회설립 1년째 되는 1952년 5월 10일 청년회에서 회원들의 헌금으로 ‘평화모자원’을 설립하고 12세대의 전쟁미망인들을 입주시킨 것은 대단히 뜻 깊은 일이었다. 모자원은 피난민 형편을 피난민 교회가 돌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1953년 4월에 이르러서는 비록 판잣집이지만 예배당 건축에 들어갔다. 이 목조 예배당은 건평이 78 평으로 당시 보수산 일대에 세워진 단일 건물로는 최대의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부산의 피난민교회로서도 첫 손 꼽히는 규모였다. 1954년 6월 13일에 헌당식을 거행한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는 설립초기부터 교회개척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먼저 교회 설립 이태 째가 되던 해인 1953년 3월에 우리교회는 교회 개척 사역을 시작한다. 김윤찬 목사가 원주제일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원주에 새로운 교회개척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 교회 집사로서 당시 원주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있던 이세진 집사를 중심으로 ‘원주중앙장로교회’ 개척을 추진했다. 두 달 뒤인 5월 31일 부산평양교회에서 임춘성 목사를 원주에 전도목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역시 두 달이 지난 7월 초 교회 대지 구입 자금으로 당시론 거금인 현금 5만 원을 헌금해 교회의 설립을 도왔다. 전쟁중이었지만 교회 개척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1953년 7월엔 ‘서울 평양교회’를 개척했다. 휴전을 전후해서 안정이 되자 교인들 상당수가 서울로 이사 하였고 이에 따라 서울 평양 교회의 설립이 절실하게 된 것이다. 김윤찬목사가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면서 두 교회를 목회 했다. 당시 우리교회는 모교회로서 서울 평양교회의 건축헌금을 지원하는 등 계속적으로 도왔다. 서울 평양교회는 얼마 후에 이름을 ‘평안교회’로 바꾼다. 합동 측의 대표적 교회 중 한곳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충남 예산에도 우리교회의 기도와 헌금이 닿았다. 예산에서 목회를 하던 평양 대동군 중이리 교회를 담임했던 김능백 목사를 도와서 예산교회의 교회당 건축과 개척에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1959년 들어 천막에서 하꼬방을 거쳐 마침내 평양교회당도 벽돌 예배당의 시대로 접어들게 하신다. 판잣집 예배당이 점차 비좁게 되면서 벽돌예배당을 짓자는 여론이 일게 되었다. 그해 9월 태풍 사라가 지난 직후에 시작된 벽돌 예배당 공사는 온 교인의 땀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발 한발 진행되었다. 이북에 고향교회를 두고 온 교인들은 이남에서 새로운 예배당 건축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