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69년

1960년대의 시작과 함께 평양교회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그 시발은 1959년 대전에서 열린 제 44차 총회에서 WCC문제로 인한 합동과 통합 측 분리였다. 평양교회는 1951년 설립되면서 이남의 평양노회가 새로 출발하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앞서 밝힌바 있다.

1952년 하나님께서는 피난 온 이북 출신 목회자들을 우리교회에서 모아서 ‘평양노회’를 재건 하셨다. 이남에서 활동하게 된 평양노회는 바로 우리교회가 모체였다.평양교회는 당시 목회자였던 김윤찬목사, 임종호전도사 등의 신학적 영향으로 중립적 위치에 서는 편을 택하게 됐다. 중립을 선언하고 맞이한 1960년 평양교회에 분열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통합측을 원하는 쪽과 합동측을 원하는 측으로 교회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마침내 1961년 2월5일 정기제직회를 기점으로 양측은 각각 다른 길을 가게 된다. WCC를 수용하는 쪽은 예배당을 차지하였고 반대하는 쪽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보수동 아랫동네 조건진 집사의 집으로 내려왔다. 그곳을 임시 예배처소를 삼아 교회를 이어가기로 한다. 한 달 뒤인 1961년 3월 첫 주 YWCA 회관을 빌려서 정식 예배처소를 삼아 다시 출발한 교회였지만 명칭을 ‘평양교회’ 그대로 사용하였다. 보수동 산에 있는 교회는 윗교회 보수동 산 아래 동네의 교회는 아랫교회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곧바로 3월 둘째 주일부터 ‘아랫교회’교인들은 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포기도 빨랐고 결심은 더 빨랐다.
1965년 3월, 아랫교회 생활 4년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의 선배들을 사용하셔서 한국은행 앞에 대청동 1가 35의 2 동아상사 주식회사 부산 사무소로 사용하던 대지 133평에 2층 포함 연 170평짜리 건물을 매입하게 했다. 4월 1일 오전 9시에 전교인이 모여서 감격의 예배를 드린 후 겹겹이 쌓여있던 먼지들을 걷어내고 2층에 삿자리를 깔았다. 당회록은 이날 “기쁨과 즐거움으로 교인들이 밤 8시까지 청소와 이사 작업을 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마침내 4월 11일 주일예배를 처음으로 우리교회 ‘단독건물 예배당’에서 드렸다. 만물이 새롭게 피어나는 봄, 부활의 소식마냥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평양교회만의 예배당이 생긴 것이다.한편 주일학교 교육에서 있어서도 1961년의 교회 분열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YWCA 회관을 빌려 시작된 아랫교회는 주일학교 교육에서도 상당한 고전을 겪게 된다. 교육 인원의 부족, 지역 어린이들을 새롭게 모아야 하는 문제, 교육공간의 부족 등은 개척교회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주일학교 부장이었던 김현국 집사를 중심으로 다시금 주일학교는 체제를 정비하여 갔고 곧이어 새로운 멤버들도 한 사람 두 사람 가세하기 시작했다. 황남철, 박원걸, 임향원, 배영일, 주은성 선생 등이 합세했고 예배당을 한국은행 앞으로 옮기면서 조영환, 박자민, 박자평, 정주채 선생 등이 거들면서 주일학교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평양교회 주일학교는 정상 궤도에 올라선다. 이 때 부임한 이가 바로 유인상전도사였고 그 후임은 이인범전도사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헌신과 봉사를 사용하셨고 평양교회의 주일학교는 비로소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