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1979년
1965년부터 5년간 한국은행 앞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은 갑작스런 대청동 도로확장으로 본당의 일부가 헐리게 되면서 마감하게 된다. 다시금 예배당을 이전해야 했다.1970년 3월 18일에 YWCA건물을 또 빌렸다. 제직들은 건축 헌금에 앞장섰다. 이번엔 이전에 Y에 둥지를 틀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끝이 없었다.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포함된 부분은 그 시절로서는 파격적인 보상가가 매겨졌으며 헐리게 된 건물에 대한 보상 또한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헐린 목재 역시 적당한 값을 쳐서 받게 되었고 도로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은 땅값이 다락같이 올라버려 아랫교회 교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복을 받은 셈이었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였다.
이런 와중에 예배당 건축 후보지로 결정된 곳이 남일 초등학교 앞의 옛 문천당 문방구 자리였다. 남일초등학교 앞은 도로에서도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건물 또한 낡아있을 뿐 아니라 터 또한 적지 않은 112 평에 이르러 웬만한 사람은 관심조차 두지 않던 곳이었다.
그러나 예배당을 건축을 준비하려는 와중에 담임목사가 이동을 하는 바람에 교회는 다시금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갓 부임한 27살 된 총각 이인범 전도사와 함께 교회와 당회원들은 전심으로 예배당 건축에 나섰다. 임시 당회장이던 이응엽목사의 집례로 우리교회의 당회는 교인들과 힘을 합쳐서 1970년 6월 2일 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된다. 새 예배당 건축 공사가 시작되자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갖추어갔다.

1970년 10월 14일 건축 와중에 교회의 이름도 평양교회에서 대청교회로 바꾼다. 더욱이 평양출신 한부선선교사가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 도중에 “평양교회가 뭡니까? 평양 사람들끼리만 모이자는 겁니까? 주님의 교회에 평양 사람들만 모여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신세타령할 겁니까? 고향 이야기만 할 겁니까?” 하며 교회 명칭을 바꾸라는 도전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황보연준목사의 적극적 목회의지도 작용, 마침내 1951년 설립 이후 19년간 달고 다니던 ‘평양교회’란 간판을 내리고 대청동의 동네이름을 딴 ‘대청교회大廳敎會’란 이름을 쓰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지역교회로서의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1970년 11월 30일 콘크리트 슬라브 3층 연 건평 256평 예배당이 완공되면서 곧바로 12월 3일에 첫 예배를 헌당예배로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청교회에 새 예배당과 함께 본격적인 성장을 주셨다. 교회의 성장은 곧바로 각 교육기관의 활동에도 활기를 띠게 했다. 제일 민감한 중고등부에서 먼저 부흥이 일어났고 곧바로 청년대학부의 성장과 이로 말미암은 교육 인력의 확보는 주일학교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1970년 장년 150명 내외에, 주일학생 150명이던 것이 1975년에는 장년 300명에 교회학교학생들 수도 300명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학생회 변화는 자연스레 대학 입시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해마다 대학 입학생이 늘어나자 1972년 임철왕 군을 중심으로 창립된 대학청년부도 1976-1977년경에 이르러서는 매주 평균 50명 가까이 출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도 해마다 10명 가까이 진학하게 되면서 재경대청 대학부가 결성되고 많게는 30여명이 정기적으로 토요일마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가톨릭회관의 방을 빌려 모임을 갖고 자체회원 명부를 작성, 관리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특기할 일은 1970년대 이후 주일학교 출신으로 곧바로 신학대학에 입학한 경우와 정규 4년제 대학을 거쳐 신학을 한 경우를 모두 합치면 30명에 가까운 목사와 전도사, 사모가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1972년 노시영 목사를 시발로 정화영 최윤석 김영화 이창호 김덕선 권창기 정기영 강재홍 임현우 강승문 박용욱 조동만 박상현 오수용 등은 신학대학과 신학교를 나와 브라질, 터키,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서울, 부산 ,대구, 강원도 등 곳곳에 흩어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다. 이들보다는 앞서는 세대로 조영환 집사와 주은성 집사 배영일 선생 정주채 선생 임향원 집사 등도 평양교회를 거친 뒤 목회의 길을 걸어갔다. 황정순 이규희 유명화 황숙영 송애경 홍정실 등은 사모의 길을 택했다.
이때 주일학교의 역사에서 꼭 기억할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면 거제도 실전리 교회 주일학교 지원과 영도 평화 모자원에 설립된 ‘확장 주일학교’였다. 1975년 이후 하나님께서는 대학부의 거제도 하계·동계 봉사를 통해 하청군 실전리 교회의 주일학교를 돌보셨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일꾼 또한 적지 않게 배출하였다. 1976년부터 부산 영도구 평화모자원에 설립, 운영했던 ‘확장 주일학교’는 이갑경 권사의 배려와 당시 목회자였던 이성배 목사, 부장 황남철 집사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후일 목사가 된 최윤석 선생을 중심으로 교사 4명이 매주 영도 평화 모자원의 예배실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함으로써 모자원 내 어린이들의 영혼에 영의 양식을 공급하게 되었다. 1977년부터는 강승철선생이 확장주일학교 설교를 맡았다가 나중에는 모자원 학생들을 주일마다 본교회로 직접 유치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