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989년

이후 80년대 들면서 대청교회는 한동안 안정된 시기를 보내면서 교회학교의 강화와 선교사파송, 구서동 현 교회당 대지구입, 부활동산 마련 등 지금의 교회의 밑바탕이 된 굵직한 사업들을 이루어낸다.먼저 이 시기 주일학교는 교사의 철저한 훈련과 교회행정에의 적응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정기성 목사의 관리 목회의 철학과 이재훈 목사의 기여를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부교역자였던 이재훈 목사는 우리 교회 주교교육에 새 지평을 열어 주었다. 교사단기 학교가 기마다 꼬박꼬박 개설되었고 거의 신학생에 가까울 만큼의 전문 훈련이 도입되었다. 성경신학, 교회사, 교육학, 교회행정 등 과목의 이수가 교사들에게 요구되었고 이를 통해 교사들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주일학교에는 박자민 집사의 헌신을 돋보이게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시절 따라 인재들을 보내셔서 자기의 양떼들을 섬기게 하신다.한편 이시기 정기성목사의 꾸준한 노력으로 교회는 해외선교를 차근차근 준비하기에 이른다. 1981년 6월 1일-5일에 대구동신교회의 김창렴목사를 강사로 선교부흥회를 가진 뒤 이어서 6월 7일 해외선교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선교회를 창립하기 이전에 전교회적인 선교 마인드를 무장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서 1981년 가을 박시경 목사가 선교사 후보로 부임해 왔다. 이미 교회에는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상당한 액수의 선교 헌금이 작정되었다.
1983년 3월 우리 교단의 총회 선교부장이었던 이영수 목사를 초청해서 드린 파송예배를 드린 뒤 박시경 선교사는 당시로선 열리지 않은 공산권을 향한 전초훈련의 길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우리 총회선교부의 공인 선교사가 지금은 2천명을 훌쩍 넘지만 그 때는 40여 명이던 시절이었다.주목할 부분은 구서동으로의 이전을 준비한 점이다. 80년대 들면서 외곽으로 인구가 이동하면서 교회의 성장도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업의 첫 단추는 당시 담임 정기성 목사의 선구자적 안목과 당회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시의적절하게 도심 공동화에 대한 대책을 목회의 중심 포인트로 놓았다. 여기에다 고 노광업, 조건진 장로의 교회 부지선정에 따른 앞선 정보와 과감한 결정은 1980년에 이르러 당시 시내 중심가에 있던 어느 교회도 엄두를 못 내던 시내지역이던 중구에서 외곽 변두리였던 금정구 구서동으로 이전 계획을 세우게 했다. 지하철이 없는 것은 물론 교통까지 불편하던 구서동 지역에 대한 부지매입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공감은 물론 이해조차 얻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계획은 조용한 가운데 실행에 옮겨졌다.
1983년 4월 8백33여평의 부지 매입이 교회의 먼 장래를 두고 이루어졌으나 정착 건축은 국토관리법 시행으로 등 떼밀리다 시피 1984년에 시공의 삽을 뜨게 된다. 그런데 교회의 형편이 헌금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던 터라 짓다간 중단하기 일쑤였다. 철근 콘크리트만 세워 놓고 한동안 있으면 관청에서 무허가로 철거한다는 통지가 오고, 그러면 부랴부랴 돈을 융통하고 어렵사리 헌금들을 모아서 다시금 벽돌을 쌓는 일을 힘들게 반복했다. 그러면서 교육관은 조금씩 모양을 갖추었고 1986년 8월 5일에 준공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대지 1백7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총 건평 5백70평짜리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이 완공되었다. 곧바로 교회는 확장 주일학교의 형태와 삼일 분산예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구서동 시대를 향한 연습을 먼저 시작했다. 그러기를 1년여, 마침내 1988년 6월 12일 설립 37주년기념 주일에 이르러 전교회의 구서동으로의 대 이동, 대청동 엑소더스가 이루어지게 된다.

1987년 2월 부활동산의 마련은 교회건축과 동시에 이루어낸 큰 역사였다. 부활동산을 마련하기위한 노력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 한국은행 앞 평양교회시절인 1960년대부터 있었다. 우리교회는 당시 경남 철마면에 위치한 땅 1천 평을 매입을 하여 초창기 소천하는 교인들의 장지로 사용하였다. 고 임종호 전도사 등이 여기에서 안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1980년 10월 5일 기장군 정관면에 위치한 4만 7천평 산을 묘지와 수양관 부지로 구입했으나 규제 묶여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땅은 지금의 해운대CC에 맞닿아 있다. 교회는 대안으로 1987년 2월 22일 교회는 묘지 허가가 난 경남 울주군 삼남면 조일리 산 412번지 A-10 좌측 1단에서 4단의 1천 평을 마련하게 된다. 재정은 정관의 산과 철마면의 묘지를 매각한 대금의 배가 들어서 다시금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다. 부활동산 마련과 조성에 당시론 거금인 1억 원에 가까운 재정이 들어갔다.
이전 시기엔 교인들의 숫자도 상당히 줄어서 200 명 내외로 뚝 떨어져 있었다. 교회학교 숫자도 2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소수의 헌금과 눈물, 기도를 사용하셔서 오늘의 구서동 대청교회 터와 예배당, 그리고 부활 동산을 마련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