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1999년

구서동으로 교회당을 이전 이후 우리교회는 교회학교의 재출발과 본당의 건축, 선교의 다양화 등의 사역과 지역교회로의 정착에 온힘을 쏟게 된다.

먼저 교회학교는 대청동에서 따라온 아이들이 소수가 있었지만 새롭게 지역의 주일학교로 거듭나야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실전리 교회 주일학교출신인 김종원 전도사의 봉사를 사용하셨다. 주일학교를 통해 성장한 그가 대청교회의 이전과정에서 주일학교의 가장 어려운 때에 한 시기를 떠메고 간 것이다. 주일마다 ‘인형탈’을 쓰고 대학생 교사들과 구서동 일대를 뒤졌고 교사교육에도 열성을 보였다.

1988년 6월 교회당 이전 전후엔 교회학교의 숫자가 150명 내외로 뚝 떨어져 있었으나 이후 교회가 안정되고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대학부와 전도기관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지역의 교회로 다시금 성장하기 시작한다.

1990년 말에는 교인수도 300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교회학교에도 200명을 상회하게 회집한다. 곧바로 본당 건물의 건축 규모와 착공 등이 문제로 떠올랐다. 본당 건축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건축 설계 등이 완료되면서 1990년 10월 8일 본당 건물의 건축이 시작되었다.1992년 3월 1일 약 1,200평 규모의 대청교회 구서동 예배당이 준공 되었고 3월 19일 첫 예배로 헌당식 거행할 수 있었다. 우리교회는 언제나 첫 예배를 헌당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

여기서 기도실 부분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사실 우리교회의 첫 건축 설계에는 찬양대 뒤편에 튀어나온 기도실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건축이 진행되어가는 도중 고 노광업 장로의 강력한 주장으로 여기에 기도실을 넣게 되었다. 이 때문에 찬양대의 소리가 잘 울려 퍼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교회에 기도실이 있어서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는 교회가 된 것이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를 맞아서 노광업장로님의 앞선 영적 혜안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편 구서동 예배당 건축비용 역시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였다. 대청동 건물을 팔아 3분의 2이상인 7억5천만원이 마련되었고 4분의 성도가 바친 무기명 헌금 4억이 모아지면서 건축비가 거의 다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알게 모르게 내리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도우심은 전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물론 전체 교회가 헌금을 작정하였지만 구서동교회의 예배당 건축은 하나님이 하신 기적이었다.

1993년 6월 13일 교회 설립 42주년을 기념하면서 곽동식 선교사를 선발, 중국의 연변 선원학교에 교수 요원으로 파송을 하였다. 역시 공산권선교였다. 우리교회가 두 번째로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한 것이다.1992년 이후부터 우리교회는 매년마다 청년인력들의 단기 선교 지원에 힘써 왔다. 단기선교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20년 전부터 청년들의 훈련과 지원에 교회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 경비의 짐을 나누어진 것이다. 청년들의 단기선교 지원의 역사만 20여 년째이다.1999년 말에 이르러서는 교회는 낮예배 장년 800명을 바라보는 숫자에 교회학교 570명 내외를 기록함으로써 이전 10년만에 장년은 3배 교회학교는 2.5배 정도의 성장을 이룬다.